꽃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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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썩 소리가 나게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은 승호는 엉덩이로 아릿한 통증을 느꼈다. 통증 뒤로 차가운 물이 바지를 축축하게 적셔들어왔다.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는 감당못할 추위를 선사했지만, 승호는 아랑곳하지 않는 표정으로 그 비를 모두 흡수해버릴 기세였다. 생기발랄한 낙엽빛의 머리카락들이 금세 미역줄기처럼, 늘어졌다. 하얗게 질린 얼굴 위로 투명한 물방울들이 튀었다. 눈을 똑바로 뜨기가 힘겨울 정도로 빗줄기는 점점 세차졌다. 그때 승호 머리 위로 투명한 우산이 드리워졌다.
[저리 치워]
승호는 눈을 조금 매섭게 떴고, 고집스러운 한마디를 던졌다. 빗소리에 쓸려 힘을 잃은 목소리가 귓가에 채 닿기도 전에 사그라졌고, 우산 주인은 못 들었다는 듯 우산을 더욱 꼼꼼히 씌웠다.
[내가 불쌍해 보여?]
승호는 이번엔 독기를 품은 눈빛으로 우산 주인을 쏘아봤다. 턱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마도 추위와 싸워 이기려는 승호의 몸부림일 것이었다. 한없이 스스로가 약해보이고 싶었던 사람의 앞에서 일부러 비를 맞아가며, 애처로운 행동을 하는 것을 병희는 어린애의 호기처럼 느꼈다. 승호는 7년이 지난 지금까지 시간마저도 역행한듯 그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얼굴도 키도 어린애같은 언변도 저 말릴 수 없는 고집스러움도.
[고집 그만 피우고 들어가]
병희는 우산대를 쥐고 있던 손을 한번 까딱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반항하는 아이에게 지금 화가 났으니 더이상 화를 돋우지 말라는 무언의 협박같은 행동이었다. 근래 들어 그가 승호에게 가장 자주 보여주었던 표정아닌가, 그걸 모를리 없는 승호의 눈빛이 조금 사그라들었지만, 여전히 굳게 다문 핏기없는 입술이 전투 태세였다. 승호는 나름의 시위를 하는 중이었다. 7년을 만난 제 남자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 이 정도 수준이었다. 비맞은 촐싹대는 똥강아지가 대문앞을 가로막고 앉아 제 주인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 따위.
[곧 아버지 들어오셔, 이런 꼴 보이면 뭐라고 변명할래]
[변명?내가 그런걸 왜 해야되는데?]
애처러운 눈빛이 무기였던 똥강아지는 이제 사나운 똥강아지로 변신해 제 주인을 할퀼 기세였다. 병희는 무거운 숨을 내뱉었다. 하얗게 뿜어지는 입김이 비오는 밤의 무서운 한파를 말해주었다. 며칠 제 몸에 소홀했던 병희는 까칠하게 자라난 턱의 거웃을 몇번 쓸며, 노곤해짐을 느꼈다. 눈꺼풀도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연일 계속되는 이 무서운 불면증이 원인이었다. 제 앞에 속수무책으로 앉아 있는 채 자라지 못한 승호는 이 쓸쓸함을 알려나, 병희는 빗줄기와 함께 밀려드는 허탈감을 느꼈다. 건강함이 무기였던 그에게 뼛속에 공기구멍이 펑펑 난듯 힘겨운 요즘의 자신에게 배신감이 드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저만 바라보는 양승호에게도.
[그럼 계속 여기에 있든가, 미련하게 병나도 책임 못진다.]
말 안듣는 아이 달래고 얼르다보면, 버릇이 나빠진다는 어르신들 말씀이 틀린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희는 사탕 대신 차디찬 빗물을 승호에게 던져주기로 했다. 그래서도 고집을 꺽지 않는다면, 그 다음엔 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해 못하는 시위는 아니었다. 분명 원인은 저에게 있었고, 책임도 저에게 한몫 있었다. 그래도 안되는건 안되는 거다. 병희는 우산을 던지듯 바닥에 내려놓고, 승호를 지나쳤다.
[병신같은건 너야!!]
격렬하게 토해지는 비릿한 외침에 병희는 뒤통수가 아찔하게 당겨왔다. 불면증이 시작되면서 간헐적으로 찾아왔던 편두통이 다시 시작된 것이었다. 승호는 몽땅 젖어서 척하고 달라붙어있는 무릎 위의 청바지의 척척한 감촉을 느끼듯 이마를 묻었다. 청각이 예민한 그에게 쏟아지는 빗소리보다 더 투명하게 들려오는건 병희의 발걸음 소리였다. 오래전부터도 익숙한 그 발걸음 소리가 들려올때마다 누구보다도 먼저 뛰쳐나가 그를 기다렸던 승호였다. 병희가 돌아서자마자 뭉텅하게 토해져나온 한마디에 저도 소름이 끼쳤다. 이대로 병희가 돌아서버리면, 밤새도록 어쩌면 내일도 모레도 언제까지라도 힘에 겨울 승호였다. 그런데 그의 발걸음 소리가 멈췄다. 승호는 꽉 쥔 두 주먹에 두려움을 싣었다.
[7년을 입닥치고 살았어! 근데 넌......이제 나더러 영원히 입닥치고 살라는거잖아!! 아무 일도......없었던 것처럼! 우리가.......우리가.......아무 사이도 아니었던 것처럼!!]
하고싶은 말이 많았다. 그 말들을 하나하나 글로 쓰라면, 성경 한권은 나올 법한 무수한 언어들이 머릿속을 가슴 속을 맴돌았지만, 터질듯한 감정의 여파가 모든 말들을 목구멍 아래서 녹여내버린 것 같았다. 승호는 찢어질 듯한 통증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원인을 모르겠다는듯 가슴 어딘가를 매만졌다.
[내가 너무 아퍼......내가 너무 아프다고!!]
병희는 쇠못이라도 박힌 듯 무겁고 아픈 발꿈치에 힘을 주고, 몸을 움직였다. 네가 떼어내지 못할 끈이라면, 내 스스로 잘라내버리겠노라고 무언의 다짐을 했다. 콰앙---경쾌하게 울리는 쇠의 마찰음, 무언가에 계속해서 할퀴어져 넌더리가 난 가슴을 부여잡고, 여느 누구보다 예민하고 감수성 짙은 승호는 피아노를 치며, 눈물을 뚝뚝 흘렸던 옛날의 요동쳤던 고통의 울림이 지금과 같다는 생각을 하며, 시멘트 바닥으로 코를 박았다. 그리고 토해냈다. 제 속에서 회오리치던 모든 토사물과 모든 오래된 찌꺼기들 그리고 미워죽겠는 정병희까지도.
제 방에서 퍼지는 따뜻한 기운에 녹아내린 시럽처럼, 질척질척한 몸을 침대 위로 뉘였다. 이대로 잠이 들어버린다면 좋겠지만, 불면증은 오늘도 그를 밤새 뜬눈으로 고민하는 청춘으로 만들어놓을게 뻔했다. 반쯤 열린 블라인드 밖으로 빗줄기는 마치 적군을 향해 쏟아지는 화살들처럼, 날카로워보였다. 저 칼날같은 비를 다 맞고 있을 승호가 떠올랐다. 병희는 거대한 스크린 속에서 예고도 없이 튀어나오는 제 연인의 얼굴을 또렷하게 떠올리며, 심연에서 무언가 꾸역꾸역 기어나올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울고 있겠지. 지우려고 해도 다시 그려지는 모습들이 머릿속을 엉망으로 헤집었다. 우산을 씌워주는 내내 몽땅 젖어버린 몸에서 비린내가 났다. 살이 타는 냄새도 났다. 그것은 기분 나쁜 냄새였다. 생선 한마리가 펄떡 펄떡 뛰는 모습이 떠올랐다. 승호는 마치 도마 위의 생선처럼 굴었다. 모든게 두렵고,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7년 동안 제 등뒤에서 살고 숨쉬었었다. 시트 위로 코를 쳐박고 사지가 늘어진 병희는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았다. 등골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무방비로 펼쳐져있던 양손을 모아 머리 위에서 깍지 끼우고, 잠시 후 꺽꺽 녹슨 쳇바퀴가 굴러가듯 힘겨운 울음을 토해냈다. 제 손으로 잘라내고, 버리고 돌아오는 길목이 끝없는 터널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서 바라보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건 돌아서 왔던 길을 뛰어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병희는 당장이라도 일어서 뛰쳐나가 그를 와락 껴안고, 예전 욕망으로 불타올랐던 어린시절처럼, 승호의 온몸을 부서뜨리고 망가뜨리고 그 입술을 다 헤집어 터트리고 싶은 강렬함을 느꼈다. 침대 시트를 꽉 그러쥐고,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웠다. 이제 나는 더이상 그때의 내가 아니라고, 모든 감정의 부산물들을 애써 외면했다. 울음은 끝도 없이 터져나왔다.
승호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애꿎은 밥속에 쳐박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기다란 테이블에 촘촘히 앉아 있던 식구들은 의아한 눈초리로 그 뒷모습을 응시했다. 병희는 한술도 뜨지 않은 제 깨끗한 은수저를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두 사람의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병희 약혼녀에 대한 이야기가 화두로 떠오르자 마자 일어난 일이었다. 병희의 어머니는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버지 눈치를 살폈다. 옆에 앉아 있는 병희 남동생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승호에게 가보라는 무언의 명령이었다. 철용이는 구겨진 인상으로 비적비적 일어나 승호를 뒤따라갔다. 아버지는 어떤 눈치도 채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약혼녀의 이야기를 꺼내었다. 처음으로 식구들에게 공표된 내용이었고, 그렇게 구체적인 약혼녀에 대한 신상은 병희 또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야!! 양승호!!]
탕탕탕!!탕탕탕!!문이 부서져라 쳐대는 통에 집안이 시끄러워졌다. 쌍둥이도 아닌 동갑의 두 형을 가졌다는 것에 늘 알수없는 불만이 많았던 철용이는 저와 피가 섞이지 않은 승호보다 그렇지 않은 병희를 더 편애했다. 단 한번도 승호에게 형이라는 말을 한적이 없는 철부지 막내였다. 2층의 가장 구석에 위치한 승호의 방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비밀의 문처럼, 단단한 잠금쇠로 잠겨진듯 했다. 철용이는 이내 포기하고 1층으로 내려가버렸다. 사위가 순식간에 적막으로 젖어들었다. 침대 위에 쳐박혀 누운 승호는 어서 빨리 병희가 뛰어올라와 마법에 걸린 제 방문을 뚫고 들어오기를 기도했다. 철용이가 다녀간 후로 어머니가 다녀가고 저녁식사를 하라는 아주머니가 다녀갔다. 병희는 결국 제 방의 마법을 풀러 오지 않았다. 어쩌면 마법이 풀리는 것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제가 방문 손잡이를 잡고 비틀면, 너무도 쉽게 열릴 것을 알기에.
승호는 한참을 꺽꺽대며 울었다. 참 서러운 눈물이 쏟아졌다. 휴대전화를 내렸다 들었다 하며 안절부절했다. 방문을 열고 내려가면 어찌되었든 부딪힐 병희인데 차마 그렇게 마주치는 것이 두렵고 무서워서였다. 제 방에 찾아와 자초지종을 설명하지도 않은 그의 눈빛이 변질되어있으면 어쩌지, 무언가에 오염되어 저를 바라보던 그 총명하고 열망으로 그득했던 눈빛이 흐리멍텅해져 있으면 어쩌나. 늦은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승호는 1층으로 내려갔다.
삐극삐극 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온 승호는 하마터면 까무라칠뻔 했다. 병희의 방을 찾아가려던 발걸음이 우뚝 멈춰섰고, 전신에 바짝 긴장이 돋았다. 켜진 티브이의 정규채널에서 지직거리는 잡음과 화면을 송신하고 있었고, 가죽쇼파 위로 병희의 뒤통수가 동그랗게 떠있었다. 승호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의 앞에 섰다. 우두커니 선 검은 그림자에 병희는 손으로 거칠어진 얼굴을 한번 쓸며, 고개를 들었다. 허공으로 마주친 눈빛에서 무언가가 순식간에 오고갔다. 원망과 미련을 담은 눈빛으로 승호는 병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번엔 승호가 그를 올려다보는 형상이 되었다.
[방으로 들어가자]
승호가 낮게 읊조렸다. 병희는 묵묵부답이었다. 눈빛에서 무엇도 읽을 수가 없어 승호는 답답했다. 다시 한번 병희의 손을 잡아 끌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그럼 여기서 얘기할래?]
승호는 그가 무슨 말이라도 속시원하게 해주길 바랐다. 어떤 변명도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리라 다짐했다. 저에게 말못할 속사정으로 가슴앓이했을 얼굴이 말도 안되게 야위어있었다. 나를 그곳에서 뛰쳐나가게 하고 찾아오지 못했던 병희가 반나절 동안 겪었을 나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을 모두 알것만 같았다. 승호는 잠깐 사이에 무언가 많이 달라졌음을 감지했다. 병희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보물찾기에 빠진 아이처럼, 그 안에서 무엇이든 찾고 싶은 간절함이었다.눈으로 온통 뒤덮힌 겨울 숲길을 걷는 것처럼, 막막한 눈동자는 잴수 없을 만큼 깊어져있었다. 그리고 꽁꽁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들어가 자]
버석해진 음성으로 낮게 뇌까린 병희가 자리에서 부석부석 일어났다. 제 손을 잡은 승호의 손을 정중하게 밀어내는 행동에 승호는 화가 치밀었다. 비밀이 없는 두 사람이었다. 마치 자궁 속에서 십개월을 함께 뒤엉켜 생명의 싹을 움텄던 사이처럼, 사이가 좋다는 말은 이 두 사람에게만 은유되는 말 같았다. 그런데 병희는 어이가 없게도 거대한 빗장을 짓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승호는 턱 아래를 부들부들 떨었다. 모래성을 삽시간에 부숴버리는 매정한 파도처럼, 병희에 대한 배신감이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변해가는 그를 감지하지 못한 둔해빠진 자신이 한심해졌다. 승호는 어둠 속에서 엉켜있던 시선을 피해 돌아서는 그의 팔을 붙들었다. 반팔티를 입은 그의 맨살이 차가웠다.
[너도 싫지? 모르는 여자랑 결혼하는거]
승호는 태연한척 웃으며 물었다. 불편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부르르 진동했다. 모든 전신의 감각이 나락으로 휩쓸리듯 불안했다. 병희는 폭풍전야의 바다처럼, 수심 가득한 침묵만을 지켰다. 방으로 들어가버리고, 조용히 문을 닫아버리는 병희. 승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동안 멀거니 그 닫힌 방문을 바라봤다. 저 문이 열리고, 제 근사한 연인이 멋지게 걸어나와 모든게 서프라이즈였다며, 개구지게 웃기를 바랐다. 승호가 존재하고 있는 모든 시공간이 가짜처럼 느껴졌다. 그가 상상했던 미래 속에서 병희가 등을 돌리고, 도망치는 일 따위는 떠올려본 적이 없었다. 얼굴 위로 쏟아져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모질게 훔쳐내고, 승호는 아랫입술을 찢어지게 깨물었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래 장난치지마. 자리를 박차고 뛰어가 방문을 부서져라 두드렸다. 세번째 두드리자 거칠게 문이 열리고, 그가 나타났다. 조금 전과 다르게 몹시 화가 난 얼굴이었다. 승호의 멱살을 잡아 끄는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속수무책으로 끌려들어간 승호는 바닥으로 뒹굴었다. 병희 방에만 있는 베이지빛의 실크 카펫으로 코가 쳐박힌 승호는 그 섬유 한줄기 한줄기에서 그의 체취를 느꼈다. 눈물나게 익숙한 냄새였다. 갑작스런 그의 폭력에 다리가 후들거려 일어서는데도 휘청휘청했다. 마주한 그의 표정에서 알수없는 살기가 느껴졌다. 갈빗대 아래 옆구리로 아릿한 통증이 일었다. 승호는 눈을 질끔 감았다 떴다. 그의 눈빛에서 제발 부탁이니 곤란하게 하지말라는 간절함이 느껴졌다. 병희가 이렇게 겁쟁이었나.
[모든 설명해봐,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아니 설명할 필요없어, 그냥 아니라고 대답만 해줘, 아무 일도 아니라고]
본래 좀 느렸던 승호의 말투가 속도를 냈다. 병희의 손목을 잡아 제 가슴으로 이끌었다.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앞에서 우는게 처량했지만 부끄럽지는 않았다. 병희 앞에서는 뭐든 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애처럼 질질 짜도 미친사람처럼, 신경질을 부려도 뭐든 받아주었던 그였기에. 그런데 오늘은 좀 달랐다. 병희는 모든게 짜증난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고, 잡힌 손목을 거칠게 빼냈다.
[너......너 정말......]
승호는 바닥으로 주저앉아 엉엉 울어댔다. 이렇게 하면 그가 마음이 약해져 저를 다시 감싸안아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리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병희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무거운 한숨만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승호가 들으란 듯이.
[으흐윽 으흑]
농도짙은 콧물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 위로 낙엽빛의 머리카락들이 척척 달라붙었다. 어깨를 서럽게도 들썩였다. 병희는 시선을 창밖으로 고정시켰다. 밖에는 어둠 외에 무엇도 보이지 않았지만,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뒤통수부터 정수리까지 신경다발이 팽팽해지는 극도의 두통이 밀려왔다. 끝없이 울기만 하는 승호를 버려둔채 서랍 어딘가를 뒤져 캡슐 몇알을 입에 털어넣었다. 생수를 꿀꺽꿀꺽 들이키고 나니 정신이 좀 들었다. 승호가 그런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초리였다. 퉁퉁 부은 눈두덩이가 발개져 있었다. 콧물이 윗입술을 적셔 반질반질해져 있는 모습에 병희는 순간 웃음이 터졌다. 승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제 앞에서 킬킬 웃는 그가 너무도 미워죽겠다는 듯. 양손바닥으로 마른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더니 병희가 양팔을 벌렸다. 승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사정없이 안기는 통에 병희가 뒤로 밀려나 서랍 모서리에 등을 찧었다.
[아야......힘만 세가지고]
병희의 음색이 조금 차분해져 있었다. 본래의 그로 돌아간듯도 보였다.
최신 로봇장난감을 얻기 위한 어린이의 단식투쟁은 길것처럼 예고되었다가 금세 식기 마련이다.두사람의 미래를 흔들어놓기 위해 찾아온 하나의 사건 앞에 무대포스러운 시위를 했던 승호였는데 제 옆에서 색색거리며 가느다란 숨을 쉬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이 포만감에 젖은 아이의 모습이었다. 병희는 끊임없이 기다랗고 힘줄이 불거진 손가락으로 아이의 머리카락들을 쓸어내렸다. 저를 곤란에 빠트린 승호를 혼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로운 분위기를 망가트리고 싶지 않아 곧 그만두었다. 대신에 조금은 뜬금없는 질문을 뱉었다.
[너 가끔은 네가 어디서 왔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건 무슨 말인데]
[네 존재에 대해서......]
그러면서 깊은 숨을 토해냈다. 승호의 정수리로 뜨뜻한 기운이 퍼졌다. 졸립기도 해서 두눈을 한번 스윽 비비고, 승호는 손을 뻗어 병희를 끌어안았다. 제품에 다 차지도 않는 날이 갈수록 커져가는 제 연인임을 새삼 실감하며, 질문의 의미에 대해 고심했다.그 마음을 눈치챈듯 병희는 질문을 수정했다. 조금 더 쉽게.
[네가 왜 어느날 갑자기 이 집안에 들어와 내 형제가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냐고]
[그러게......이상하다.]
마치 남의 사정이라는 듯한 무성의한 말투로 승호는 답했다. 병희는 그런 그의 어깨를 한껏 끌어안아 제 품에 깊숙이 가뒀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흐릿한 불빛에서 점점 멀어져 피로감에 젖었던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즈음 병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승호가 자신이 던져놓은 가시에 찔리지 않도록 몹시도 애정어리고,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생각을 해봤는데......가끔은 우리가 알고 있는 네가 진짜 네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리곤 가만히 뒤통수를 쓸었다. 낙엽빛의 머리카락들은 새의 털처럼 가볍고, 부드럽게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갔다. 욕심껏 움켜쥐어도 모두 도망쳐버리는 물처럼, 허무맹랑하게.
병희는 언제부터인가 제가 알고 있는 승호의 존재에 대해 의심했다. 아버지는 당신의 오랜 병인 엄격함과 가장의 권위를 무기 삼아 가족들의 모든 의심을 불살랐고, 승호를 틀안에서 보호해왔다. 처음 제 앞에 등장했던 승호는 아버지의 커다란 손바닥에 등을 떠밀린 열일곱의 사춘기 남자아이였다. 모든게 낯설고 흡입하는 공기마저도 무섭다는듯 몸서리치는 모습이 어린 병희의 눈에도 느껴졌었다. 조금은 가련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버지의 일방적인 통보 앞에서 얼빠진 얼굴이 된것은 병희뿐이 아니었다. 어머니도 철용이도 마찬가지였다. 별채에만 계시다가 별스럽게 찾아오신 할머니만이 승호의 뺨을 어루만지며, 웃으셨던가, 우셨던가. 이제 떠올려보니 울고 계셨던가. 병희는 까마득한 기억을 애써 꺼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뒤통수의 어느 신경줄기가 또다시 미끈하게 당겨졌다. 승호라는 존재는 역시나 병희에게 있어 난해한 문제풀이의 연속이었다.
[아버지가 널 처음 데리고 오셨던 날......할머니 빼고 우리 모두가 널 의심했어, 아니 아버지를 의심했지. 네가 죽은 죽마고우의 아들인데 혼자 남은게 가여워서 거두었다는 한마디에 아마도 어머니나 철용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거야, 온갖 더럽고 추잡한 상상들이 머릿속을 스치는데 단순히 의심으로만 아버지에게 실망했지]
[그랬던거야, 그때 그 표정들이]
승호도 그 당시를 떠올리는듯 눈동자를 위로 향했다. 병희는 기다란 팔과 다리로 승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꽈배기 과자처럼, 얽었다. 두개의 몸으로 살던 두사람이 열일곱에 처음 만나 스무살이 되던 어느 여름날 처음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그때의 미칠듯한 전율감이 되살아난듯한 기분이 들었다.
[난 모르겠다.......]
[뭐가]
[내 모든 의심과 아버지를 향한 불신들......십여년이 넘게 무겁게 짊어져왔던 상상들......캐내어볼 생각도 수없이 했었어, 근데 진실을 알고 나면.......결과가 어떻든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넌 그냥 너로서 존재하는 것일 뿐인데.....널 괴롭히고 싶지 않아서 그만 포기하고 또 포기했었어]
병희는 힘겹게 진심을 토해냈다. 제 연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죄악이었다. 죄책감에 시달려왔던 제 가슴이 이제서야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승호는 그런 그의 몸통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내가 이렇게나 힘들었는데 너는......]
[병희야]
[너는 모두 알고 있잖아......]
[병희야....]
[난 이제 알아야한다고 생각해, 네가 입을 열어야한다고 생각해]
승호는 무언가를 감추듯 점점 더 가슴 깊숙히 파고들었다. 조금 빨라진 심장의 박동소리와 병희의 완강한 말투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뭉퉁 잘려나간 제 열일곱 이전의 모든 기억들이 빠른 속도로 되살아날듯한 두려움이 앞섰다.
[난 기억이 안나......아무것도]
[아니, 스스로를 부정하지마, 기억할 수 있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을 뿐인거야]
[그만두자 그런 얘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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